주일예배

평상시 의분이 가득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무언가를 거부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보이는 병원에 들어갔지만 의사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이에 청년이 항의하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의사는 진료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청년이 ‘내가 우습게 보이냐?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것이냐? 안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하니 의사가 ‘여기는 동물병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119에 신고를 하고 병원에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물이 필요하면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열왕기하 16장의 말씀은 남유다 아하스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하스 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인생에 문제가 닥칠 때 누구에게 어떻게 나아가야 되는 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2절을 보시면 하나님 앞에 이 왕은 정직히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2).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녀를 산채로 불 가운데 지나게 할 정도로 악했기 때문입니다(3-4). 왜 아하스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당시 아하스 왕은 몰렉이라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몰렉을 숭배할 때, 몰렉신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인신제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우상숭배를 하던 남유다가 큰 어려움에 처합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몰렉에게 바칩니다. 자신을 위해서 아들을 바치는 자가 왕인데, 그 사회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불의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하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극한 상황 속에서 아하스는 하나님을 향해 구해달라고 소리치기는커녕 자신의 눈에 강한 이웃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7).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더더욱 사람을 의지합니다. 도움을 구하러 가서 자신을 한없이 비하하면서, ‘나는 왕의 종입니다. 당신의 종이니 나를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을 비하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고난이라는 싸인이 왔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삶에 고통을 주시고, 고난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깨닫고 돌아오라는 싸인이 바로 고통과 고난입니다. 한 해를 살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고난과 고통이 우리 가운데 있었다면 이 고난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인이, 고통과 고난이 찾아왔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신라가 통일을 했을 때, 내려오는 걸사표라는 역사 자료가 있습니다. 걸사표는 그 문서가 구걸하다시피해서 보냈다고 해서 걸사표라고 합니다. 특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걸사표가 많습니다. 이 걸사표를 보낸 이후 이 문서를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사대주의 문화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데,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 제도와 복장이 바로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역사는 이부터 ‘사대주의’라고 합니다.
여러분! 좋은 것은 분명히 배우고 수용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사대주의’입니다. 지금 아하스왕의 행태가 딱 사대주의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 다른 왕에게 무릎꿇고 굴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문화적으로도 굴종적인 태도가 나타난다고 오늘 말씀은 설명합니다.
지금 앗수르 왕은 디글랏 빌레셀롯, 아하스는 그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왕이 직접 가서 바치는데, 이 아하스가 디글랏빌레셀을 만나러 갈 때 무엇을 보았습니다. 그 나라의 부함과 화려함, 고급스러움을 보게 되면서 앗수르는 ‘ 이 나라가 잘사는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보았던 것이 바로 앗수르가 섬기는 우상 신전입니다. 이것을 보자마자 아하스는 앗수르에 있는 제단과 똑같이 만들 것을 유다의 우리야 제사장에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주신 성전이 이미 있습니다. 비록 앗수르에 비해 작고 소박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전통을 지키는 성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화려해보이고 멋있어도, 그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 화려함에 속아 넘어가서 믿음을 송두리째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을 자기 나라에 만들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가운데 신앙을 지켜야할 제사장은 어떠합니까? 한 나라의 왕이 헷갈려 할 때 제사장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대로 따릅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큰고 매력적인 것을 따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가 우리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사대주의 곧 세상에 서 화려하고 좋은 것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이 하하스는 예루살렘에 와서 더 큰일을 벌입니다. 놋받침대와 놋바다들은 제사에 쓰이는 도구인데, 이 도구들을 자기 임의대로 바꿔버립니다(17). 이 도구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놓인 것인데, 이것을 자기 식에 편한대로 뜯어고치고 예배순서도 뜯어고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먼 아하스는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꿉니까? 앗수르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바꿉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세상식으로 바꾸기를 바랍니다. 내가 필요할 때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앗수르식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축원드립니다.
심지어 어떤 일까지 할까요? 18절에 낭실 곧 현관을 뜯어 고칩니다. 안식일날 제사를 드릴 때 왕은 현관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 현관을 폐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들과 지내겠다고 한다면 낫지만, 오히려 앗수르 왕을 의식해서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지금 아하스 왕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두려워하고 잇습니다. 풍전등화 같은 이스라엘에게 앗수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 해야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신, 여론, 큰 힘에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만약 두려움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두려움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나가길, 마음이 평안과 확신에 차길 축원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지켜지지 않을 때 일이 생깁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가 생길 때 앗수르가 아닌 하나님께 가십시오. 이 말씀 가운데 여러분의 인생에 임마누엘 복이 임하길 바랍니다. 이 고백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화명중앙교회 가족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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