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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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아브람, 하나님 나라의 시작(3)" 창세기 12장 4-9절 신재형 목사
By 박혜인
2024월 06월 21일
아브람, 하나님 나라의 시작(3) (창11:27-12:9)
<설교 주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다.
<설교 대지>
1. 타락한 세상 나라 속에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11:27-12:1)
2.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12:2-5)
3. 예배를 통해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12:6-9)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이라는 세상 나라가 세워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발은 바로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부르실 때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세상 나라는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거룩한 계보도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타락한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부르심과 함께 조용히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다시 한번 더 부르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왔지만,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출발이었지만, 하나님 나라는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람을 다시 한번 더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를 조금씩 움직이시고,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약속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겠다는 약속입니다. 비록 이 약속은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직은 실체 없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담보 없는 말뿐인 계획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그 약속에 자신과 가정을 맡겼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며, 그 면면이 세워집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려고 하십니다. 종종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이미 부르심이 끝난 것처럼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미 천국가게 되었고, 이미 하나님 자녀이며, 이미 몸과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부르심이 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번에 완성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혼자서 다 하시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연약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들이 함께 세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믿으며,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과 가정을 맡기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면면을 세워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설명해도 담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인도와 섭리를 믿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설명이 조금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 가정을 가나안의 중심부,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로 인도하셨습니다. 상수리나무는 가나안 사람들이 신탁을 받는 사당이 있는 곳입니다. 이후에도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항상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깁니다(참고. 삿9:6; 사57:5; 렘6:13). 뱀의 후손인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는(참고. 창12:6) 세겜 상수리나무로 아브람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드디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절)라고 구체적인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쩨쩨하게 대적이 약해질 때를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 자녀들에게 하늘의 밥상을 베푸시고, 사자와 곰의 아가리를 찢어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연약하지만, 자녀도 없지만, 나그네이지만 아브람과 그 가정을 바로 사단의 심장부로 인도하셔서 약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브람도 이 하나님을 믿으며, 세겜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벧엘에서도(12:8), 헤브론에서도(13:18), 가나안 땅 요충지를 다니며 제단을 쌓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을 청소하듯, 정결하게 만들어 봉헌하듯 말입니다. 나중에 야곱 역시 이 과정으로 제단을 쌓으며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창33:18, 20[세겜]; 35:6-7[벧엘], 27[헤브론]). 나중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세겜, 벧엘은 중요한 장소로 먼저 정복하고, 언약을 세우고, 성소를 세우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합니다(참고. 신11:29-30; 수24:1, 26등). 부모가 대적들의 눈앞에서 드린 예배로 자녀들이 돌아오며, 바로 그 땅을 정복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단의 심장부, 지옥의 권세 바로 그 아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오히려 완성되어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으셨습니다(참고. 엡2:6).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은 사단의 심장부입니다. 문제가 가득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드리는 예배로 우리의 자녀가 돌아오며, 그 문제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정복해 나갈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일반적으로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분들에게는 봉사의 기회를 제한합니다. 왜 그럴까요?
2. 예배를 통해 승리와 회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5
2월 25일, "엘리야의 기도(2): 다시 기도한즉" 야고보서 5장 17-18절, 신재형 목사
By 박혜인
2024월 02월 25일
엘리야의 기도(2): 다시 기도하니 (약5:17-18)
- 분들은 유투브에 있는 설교를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 주제와 대지는 설교를 이해하고 기억하며 한 주간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설교 주제>
우리의 기도는 교회(개인, 가정)의 거룩한 회복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
간절히 기도하여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도록 했던 엘리야는 다시 기도하여 비가 오게 합니다(본문 18절). 본문의 배경이 되는 왕상18:41-46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이것을 확신하며 선포했고, 또 확신하며 기도했습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상8:35-36을 보십시오. 다시 비가 오는 것은 그들의 회개에 달려있고, 이 회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이곳(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하며”, 둘째는 “주의 이름을 찬양(인정)하고”, 셋째는 “죄에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왕상18:36-40을 보며 이 조건이 맞는지 확인합시다. 이 본문에 따르면 이 과정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했고(두 번째 조건), 엘리야의 명령을 따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이면서 죄에서 돌이켰습니다(세 번째 조건). 이것을 본 엘리야는 마지막 퍼즐을 맞춥니다(왕상18:41-42). 그의 이 기도의 행위는 간절한 기도라는 의미를 넘어 첫 번째 퍼즐을 맞추는 기도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받은 이유는, 지난 주일에 살폈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할 내용이 있습니다. 위 구절에서도 읽었듯이 범죄한 이스라엘이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인정할 수도, 스스로 먼저 죄에서 돌이킬 수도, 스스로 먼저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엘리야만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오직 하나님께서 이 일을 계획하실 수 있었습니다. 왕상18:1을 보십시오. 회개의 아무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때, 회복의 증거가 단 하나도 없었던 그때, 엘리야를 보내기로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말씀을 깨달을 마음도 없었고, 죄에서 돌이킬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말씀도 듣고, 회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 일에 헌신했습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도 없는 그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기도했습니다. 이방 신들의 대리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앞에서, 잘못된 죄악의 물결을 거슬러 기도했습니다. 그저 불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능력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 달라고, 이스라엘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셨던 하나님께서는 바로 한 사람의 기도에서 이것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가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들며 당시 교회에게 기도하게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의 교회도 많은 죄와 악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고,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함부로 했고, 다툼과 시기와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이 당하는 병과 같은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병든 자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병원에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장로들이 기도하면 모든 질병을 낫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악행을 꾸짖어 죄에서 돌이켜, 혹시라도 그들의 죄에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들을 포함하여 이들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했으며(16절), 이로써 이들은 진리를 떠나 죄에 빠진 자들을 돌아서게 할 수 있었습니다(19-20절).
우리 예수님께서도 아무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없었을 때 기도하셨습니다(막14:36; 눅23:34). 말씀의 성취를 위해, 또한,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6:12-13).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기도와 같습니까? 아니면 엘리야의 기도와 같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그저 소원을 비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말씀의 성취와 교회(개인, 가정)의 거룩한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까?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왜 여러분은 먼저 기도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18절 마지막 부분,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는 말씀은 우리의 기도가 3년 6개월의 가뭄을 넘고, 마른 땅을 넘어 곧바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 있는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이런 열매 맺는 기도를 위해 보내셨습니다! 말씀을 잘 배우며, 거룩한 회복을 꿈꾸는 기도를 하므로 많은 사람을, 우리의 사람을 돌이키는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됩시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하도록 하시기 위해 보내셨다는 말씀을 자신에게 비춰봅시다. 그리고 드는 생각을 서로 나눕시다.
2.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위해 엘리야처럼 해야 할 기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18
2월 18일, "엘리야의 기도(1):간절히 기도한즉" 야고보서 5장 17-18절, 신재형 목사
By 박혜인
2024월 02월 18일
엘리야의 기도(1): 간절히 기도한즉 (약5:17-18)
● 설교 주제와 대지는 설교를 이해하고 기억하며 한 주간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설교 주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능력 있는 기도인 엘리야의 기도는 비를 멈추고, 또다시 비가 오게 한 기도입니다. 교회를 제법 다녔고, 기도에 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엘리야처럼 기도해 보려고 노력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수련회와 같은 교회 행사를 앞두고 우리는 종종 이 본문을 근거로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 기도가 응답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본문에는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도 함께 언급되는데(15-16절), 왜 우리의 기도는 자주 실패(?)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자주 오해하며, 자기 좋은 대로 사용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죄에 대한 고백(16절), 죄 사함의 문제(15절)을 다루며, 비가 오지 않도록 종종 기도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달리 심지어 비가 오도록 기도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즉, 본문이 말씀하는 핵심은 우리의 관심사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왕상17:1을 보면 엘리야가 갑자기 나타나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이 본문에는 ‘기도’했다는 말은 없지만,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엘리야가 이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선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는 발언(?)을 할 수 있었고, 또 이것을 기도할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점쟁이나 무당이 아닙니다. 갑자기 느끼고, 감각하여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런 행위를 일절 금합니다(신13:1-5).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계시를 받지만,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잘 아는 가운데,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이 기도와 선포는 이전에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28:20-24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비를 내리지 않으심으로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등장했던 시대는 아합 왕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왕상17:1). 이 시대의 범죄상을 알려주는 왕상16:30-34을 찾아 보십시오. 아합 왕 이전 시대는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지만(2
계명 위반) 그래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아합 왕은 이 죄를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하나님 대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예배하며, 신전을 지었습니다(1계명 위반). 다시 말해 신28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보았던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저주와 심판을 내려달라고 기도했고,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도 이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가 능력 없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단지 비를 제어하는 기도가 아니라, 범죄하는 자녀들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였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불완전하고 오히려 불확실한 우리의 느낌과 의지, 경험에는 확신을 가지면서, 완전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저주를 위한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 충격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꼭 필요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잊은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주와 심판이 엘리야의 기도 목표가 아닙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와 심판을 통해 깨닫게 하고 돌이켜, 다시금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해 이런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그 기도대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기도를 하고, 응답 받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원리가 잘 실천되지 않는 교회의 현실을 보며,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운 ‘우리’가 ‘말씀’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의 원리가 잘 실천되지 않는 가정의 현실을 보며,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면서까지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에 자신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은 혹시 그저 우리의 사람들이 잘되도록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자녀의 신앙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그것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더 마음을 담아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2. ‘우리’라는 고백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동행’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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